2014-04-18

『인문예술잡지 F』 제13호(2014.4.30 발간예정)부터 본 잡지 편집위원이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이신 이상길 선생님의 『부르디외와 그 동시대인들』 연재가 시작됩니다. 13호에 실릴 「미시권력과 미시저항― 부르디외와 세르토」를 시작으로 앞으로 총 10회가 연재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아래는 이상길 교수님께서 쓰신 연재 서문입니다.

 

「부르디외와 그 동시대인들」 연재를 시작하며

 

이 연재의 제목은 1994년 프랑스에서 나온 『미셸 푸코와 그 동시대인들』이라는 책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그 저자는 푸코의 전기로 유명한 언론인 겸 지성사가이자, 지금은 퀴어 철학자로 변신한 디디에 에리봉이다. 에리봉은 이 저작에서 자신의 푸코 전기에 미처 다 담지 못한 푸코와 주변 인물들-뒤메질, 바르트, 알튀세르, 라캉, 하버마스 등-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요 몇 년 새에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그 동시대인들』라든지, 『리쾨르와 그 동시대인들』같은 책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에리봉의 책 제목은 원래 프랑스 학계와 출판계에 전형적인 작명 방식들 가운데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자체가 어느덧 사소한 모방의 진원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내가 『부르디외와 그 동시대인들』이라는 책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바람을 처음 가졌던 것은 에리봉의 저작을 접하고 나서였던 만큼, 이 연재의 영감의 원천을 거기로 돌린다 해도 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제목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이 연재의 내용과 형식을 큰 틀에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 진술의 의미는 ‘동시대인들’이라는 용어를 ‘대화자들’이라는 용어와 비교해보면 금세 드러난다. 가령 철학자 아놀드 데이비슨이 편집한 <푸코와 그 대화자들>이라는 책이 있다. 데이비슨은 그 책에서 캉길렘, 촘스키, 들뢰즈, 데리다, 아도(P. Hadot), 세르(M. Serres), 벤느(P. Veyne) 등이 푸코에 관해 쓴 텍스트들을 모아놓고 소개 글을 달았다. 데이비슨이 소환한 저자들은 푸코와 좀 더 긴밀한 지적 대화나 교분을 나눴던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에리봉이 소환한 저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동시대인들’은, 당연한 토 달기에 지나지 않겠지만, ‘대화자들’에 비해 한층 더 막연하면서도 넓은 범주이다. 그들 가운데는 물론 ‘대화자들’도 있겠지만, 그저 같은 시대, 같은 학문 영역 안에 있었다는 가느다란 인연의 끈만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재는 부르디외와 그 주변 인물들, 그러니까 딱히 ‘대화자들’은 아니었지만, 그와 어떤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고심했던 ‘동시대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부르디외가 1930년생이고 1960년대부터 약 40년 동안 왕성한 활동을 벌인 사회학자이니만큼, ‘동시대인들’의 범위에는 20세기 후반 프랑스 학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던 비슷한 연배의 지식인들이 들어간다. 이는, 돌려 말하자면, 부르디외에게 중요한 지적 영향을 미쳤던 선생들-예컨대, 바슐라르, 캉길렘,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등-이라든지, 외국 학자들-예를 들어, 엘리아스(N. Elias)나 고프만(E. Goffman), 시쿠렐(A. Cicourel) 등-, 혹은 다양한 분야의 숱한 제자들은 이 연재의 고려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내가 특히 염두에 두고 있는 부르디외의 ‘동시대인들’은 첫 회에서 논할 세르토(M. de Certeau)를 비롯해 벤느, 푸코, 파스롱(J-C. Passeron), 데리다, 바르트, 보드리야르, 알튀세르, 랑시에르, 라투르, 볼탕스키(L. Boltanski), 에리봉 등이다. 잠재적 후보군 가운데 내가 하필 이들을 추린 이유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관심의 편향과 지식의 한계 탓이 크다. 하지만 거기에는 약간의 객관적인 근거도 없지 않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불화’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는데, 이들은 모두 부르디외와 사유 상의 불화를 겪었다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부르디외와 지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분석철학자 부브레스(J. Bouveresse)라든지 역사학자 샤르티에(R. Chartier) 같은 이들이 이 연재의 대상 인물군에서 비껴난 것은 다름 아닌 그러한 기준이 작용한 결과다.

생전에 부르디외는 수많은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또 그만큼 많은 이들로부터 못지않게 비판받았다. 그러한 비판(대상)자들 가운데는 원래 그와 사적인 인연이나 친분이 있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 연재에서 다룰 지식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말이다. 부르디외가 그 ‘동시대인들’과 겪은 불화의 실제 형식이나 성격은 뭐라 한 데 묶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공격한 경우도 있었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노골적인 공방전을 벌인 경우도 있었다. 공적인 논쟁이 이루어진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내부자들이나 겨우 알 법한 은밀하고 암시적인 비판이 오간 경우도 있었다. 불화가 그저 지적인 차원에 머문 때도 있었지만, 그 선을 넘어 인간적인 갈등과 반목, 관계의 단절로까지 이어진 사례 또한 드물지 않았다. 하나 유념해야 할 사실은 이 연재의 ‘동시대인들’ 명단에 오른 인물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부르디외의 ‘대화자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 간에는 딱히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대화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니 불화는 ‘대화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저 ‘대결의 상흔’에 가깝다. 그것이 결코 생산적인 합의나 평화로운 결론이라는, 멋진 해피엔드로 이어지지 않았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 불화로부터 얻을 것이 없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 ‘얻을 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문제들’이 되지 않을까? 불화의 지점들을 하나씩 되짚어가면서, 우리는 그들을 대립하게 만든 어떤 문제들의 지형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상징투쟁의 선혈로 얼룩진 그 지형이야말로 지난 세기 프랑스 지성사에서 우리가 기억해둘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정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이 연재의 목표는 부르디외와 다른 지식인들 간 지적인 영향관계나 계보를 탐색하는 데, 또는 특정한 입장을 옹호하거나 새로운 종합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상이한 관심과 영역, 참조체계를 가진 사유들이 어떻게 ‘공통의 질문’이라는 전선에서 만나 부딪히고 종내 신음하며 피 흘렸는지를 드러내는 데 있다. 부르디외를 비롯해, 연재에서 다루어질 저자들의 사유가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기술되지 못한 채, 어떤 논쟁점들을 둘러싸고 부분적으로만 제시되는 이유도 어느 정도는 그 때문이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내게 그들 사유의 전모를 충실하게 논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데 있지만 말이다. 20세기 후반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발히 활동한 프랑스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질문들, 그들로 하여금 때로는 서로 공격하고 심지어 결별하게까지 만든 그 질문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부르디외와 ‘동시대인들’ 간 불화의 기록은 그 질문들의 전선에로 우리를 다다르게 해주는 일종의 병참로 구실을 할 것이다. 그들이 그 격전지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싸웠는지, 그리고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 전투의 자취가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하는 일은 이제 참관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