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20호 두드림:

2010년 창간한 <인문예술잡지 F>가 이번 호로 통권 20호를 맞는다. 사람이건 잡지건 그저 살아남기조차 쉽지 않은 시대에 5년이 넘는 시간을 잘 버텨왔다고 속없이 자축하기엔, 우리 주변의 풍경이 너무도 황폐하다. 박근혜 정권의 행태는 유신 시절과의 비교를 더 이상 단순한 비유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지 않은 지 오래다. 연극계와 미술계를 비롯한 예술계 곳곳에서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는 전근대적인 검열이 횡행하고, 최근의 부산영화제 사태가 단적으로 시위하듯, 예술 주체들의 자율성을 위협하는 온갖 형식의 ‘국가 테러’가 벌어진다. 연이은 우파 정권 아래 고삐 풀린 자본 역시 다양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예술에 대한 통제에 가세하고 있다. 특히 작가의 설 자리, 작품의 만들어질 권리를 함부로 빼앗거나 자기 이해관계에 맞추어 조종하는 식으로 말이다. 게다가 행정 권력과 부동산 자본이 주도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광풍은 신진 예술가들의 거주와 활동 공간을 점점 더 심각한 불안정성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면 이 모든 악조건, 이 무식하고 적나라한 억압과 교묘하고 영악한 조작의 틈바구니에서도 수많은 예술 주체들이 현실의 중력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엄혹한 사회적 존재 기반에 대한 고민을 통해 스스로의 깊이를 더해가고, 예술계 외부와의 접속과 연대를 통해 스스로를 넓히려 애쓰는 모습에 주목한다. 그들은 ‘미학의 자율성’을 섣불리 물신화하거나 혹은 쉽게 기각해버리려는 양극단의 유혹을 피해가면서, 사회학적 탐구와 사회적 횡단을 ‘매개로’ 자율적 미학의 이상을 실험한다. 그와 같은 시도의 중요한 부분이 사회 속에서 (예술가 자신을 포함한) ‘지배 받는 자들’의 물리적인, 나아가 상징적인 ‘자리’를 보듬거나 지키거나 혹은 새롭게 만드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1990년대 말 프랑스 학계에서 나온 ‘장소투쟁(lutte des places)’이라는 용어를 20호 [고함(특집)]의 주제로 삼은 이유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비평지라는 <인문예술잡지 F>의 성격상 ‘장소투쟁’에 엄밀한 개념 정의를 부여한다거나 그것을 둘러싼 학술적 논의를 재구성하는 것이 특집의 주된 목표는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그 용어를 통해 구체적인 장소의 점유가 사회적 대립과 투쟁의 중심으로 떠오른 상황을 포착하고, 그것이 인문학적 사유와 예술 생산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관한 여러 갈래의 성찰을 자극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그러한 측면에서 독자들에게 나름대로 알찬 정보와 예리한 논점 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김동일은 장소특정성 개념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부터 시작해 한국 미술계에서 장소특정성을 의미 있게 구현한 선구적인 성과로 ‘민중미술’, 특히 ‘두렁’의 작업을 호출한다. 신혜영은 작가 김동희의 궤적을 환기시키며 최근 몇 년 사이 급증한 미술 신생공간들이 갖는 사회문화적 의의를 재조명한다. 사카구치 교헤는 자신이 광주 아시아예술극장 개관 기념 공연으로 작업했던 <제로 리:퍼블릭>을 중심으로 장소에 대한 자신의 일관된 문제의식을 진솔하게 풀어낸다. 김지현은 런던 발프론 타워의 건축과 ‘재생’을 놓고 불거진 사회적 논란을 추적하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둘러싼 예술가들의 개입과 고민이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일깨워준다. 로익 바캉(Loic Wacquant)은 시카고 교외 게토 지역의 사례를 들어 사회집단들의 공간적 배치 속에서 상징폭력이 어떻게 작용하며 집단심리를 어떻게 구조화하는지 치밀하게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장소투쟁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미셸 뤼소(Michel Lussault)는 뉴욕의 ‘점령하라’ 시위에 대한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저항운동과 일정하게 결을 달리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이 장소성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 논의한다. 장소투쟁의 문제를 여러 맥락에서 여러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이 글들은 비록 고전적이고 직접적인 ‘작품 비평’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 예술실천 현장의 역동성을 북돋우는 성찰의 자양분이 될 것으로 믿는다.

이밖에 이번 호 고정란의 글들 역시 독자들의 이목을 끌만하다. [돌아봄(리뷰와 인터뷰)]에서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서울바벨>전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윌리엄 켄트리지>전을 기획자와 질문자의 말들의 부딪힘을 통해 다시 조망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서울바벨>전 대담은 특집 글들과의 직접적인 연관 속에서, <켄트리지>전 대담은 예술과 정치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더욱 흥미롭게 읽힐 수 있을 법하다. 김소희는 2015년 나온 가장 빼어난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허우 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을 프롤로그의 슬로우 모션에 대한 분석을 매개로 섬세하게 되짚는 비평을 보내왔다. [말세움(비평)]에 실리는 이상길과 윤인로의 연재 글들 또한 권력에 대한 우리의 비판적 인식을 심화시키는 데 유용한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인문예술잡지 F>의 20호를 준비하며 10호의 특집 주제가 ‘우정’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린다. 사실 의 한호 한호가 터무니없이 작은 보상에도 아랑곳없이 정성껏 글을 써준 ‘필자-친구들’ 덕분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 기회를 빌려 그 분들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특히 이번 호에는 기획 취지에 공감한 여러 명의 외국 필자와 작가 들이 흔쾌히 힘을 보탰다. 무상으로 원고, 또는 작품의 게재를 허락해준 사카구치 교헤, 로익 바캉, 미셸 뤼소, 사이먼 테릴(Simon Terrill), 랩 할링(Rab Harling)에게 감사한다. <인문예술잡지 F>의 발간이 척박한 인문·예술담론의 장에서 우리가 벌이는 일종의 상징적인 장소투쟁이라면, 그 투쟁의 가장 든든한 토대는 무엇보다도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독자들에게로 그 우정의 네트워크를 확장함으로써 우리의 투쟁을 끈질기게, 그리고 더욱 충실하게 이어나가고자 한다.

F20호 목차

두드림

F20호를 엮으며:_ 이상길

고함: 장소 투쟁

장소특정성 미술에 결박된 몇 개의 어휘들_ 김동일
예술가들, 도시의 틈새에서 시간을 빌리다 – 미술 신생공간에 관하여_ 신혜영
0원 생활권의 장소를 발견하기: <제로 리:퍼블릭>(zero re:public) 프로젝트_ 사카구치 교헤
권력이 건축적 야수를 길들이는 법 – 런던 발프론 타워의 ‘재생’ 프로젝트를 둘러싼 쟁점들_ 김지현
하이퍼게토(Hyperghetto)에서 도시 황폐화와 상징적 모멸_ 로익 바캉
새로운 장소투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_ 미셀 뤼소

돌아봄

작동하지 않는 공동체로서의 신생 공간:
<서울 바벨> 전 협력 윤율리 인터뷰
현대미술의 거장에 대한 성찰적인 전시: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 전 큐레이터 이수정 인터뷰
무협의 액션을 사유하는 모션/이모션:
<자객 섭은낭> (허우 샤오시엔, 2015)_ 김소희

말세움

예속의 위험, 자유의 모험- 부르디외와 푸코(5)_ 이상길
신성가족의 통치기밀- 세월호의 항적으로부터: 여기의 신정정치(3)_ 윤인로

F 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