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들은 무대 뒤를 볼 수 없었다. 무대 뒤의 소란과 바쁜 움직임은 무대 앞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위해 감추어야 했다. 무대 뒤에서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부고를 듣고 울던 배우도 쇼가 진행되면 눈물을 훔치고 무대 앞으로 나가 웃어야 했다. 캔버스 위의 두터운 덧칠에서 화가의 노고를 엿볼 수는 있어도 작가의 작업장을 전시하지는 않았다. 음악을 연주하면서 복잡한 화성악적 계산을 설명하지도 않았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한다고 믿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상황은 돌변했다. 작품이 작가와 작가를 둘러싼 이야기들과 함께 소비되기 시작했다. 요절한 천재나 세기의 바람둥이 같은 풍문은 예전에도 있었고, 많은 이들의 작품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작가의 민낯과 사적인 사연이 작품과 하나의 이야기로 엮여 관객을, 청중을, 그리고 독자를 만나지 않았다. 여기서 오래된 질문이 다시 시작된다.
예술 작품은 본질적인 ‘참’이나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가? 아니면 모든 작품은 맥락 속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작가들은 고민한다. 무엇으로 다른 이들과 소통할 것인가?

그렇다고 작가의 개인적인 배경, 사연, 작업 과정, 전문가들이나 성공한 오타쿠들의 비평, 그리고 작품이 보는 이들에게, 듣는 이들에게 모두 투명하게 공개된 것일까? 투명성은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다시 불투명해진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듯이 작가와 관객이 놓인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정보의 양과 공개된 과정이 편집된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관객들이 과정을 공유하고 비평을 따라하면서 작품을 온전히 소유했다는 안온감, 혹은 즐거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 감정들도 본질적으로 편집되고 만들어진 것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작품이 이야기와 함께 팔리는 현상에 주목했던 이유는 작품과 인간을 함께 팔아야 하는 시대의 고달픈 예술가들의 상황을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문

특집: 오픈 백 스테이지
과시생산과 작가하기 _ 심보선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편집되는 것이어서 진정하다 _ 김수아
오디션 프로그램과 음악산업,
혹은 한없이 투명한 엔터테인먼트와 소비자 _ 차우진

연재
예속의 위험, 자유의 모험 ? 부르디외와 푸코(2) _ 이상길
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 Part 2
고유명으로서의 이미지와 아트갤러리로서의 영화관(下) – 유운성
사회를 재생산하지 말아야한다 _ 김항
혁명의 넝마주이,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읽기 _ 김수환

리뷰
사막의 극장, 그 관객을 찾아 :
<전략적 오퍼레이션 ? 하이퍼 리얼리스틱> _ 남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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