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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림: 가라앉음

지하 혹은 반지하 방에 내몰려본 이들은 알 것이다. 습기에 눅눅하게 젖어들며 곰팡이군에 점령당하는 사물의 피부, 햇빛의 원조를 받지 못해 창백하게 바스라져가는 공간의 얼굴, 심지어 얼룩진 시간의 눈금들로 인해 밤낮을 알 수 없게 되는 것보다 더 괴로운 무언가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바로 ‘가라앉는’ 느낌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이미 가라앉은 채로 눕고, 가라앉은 채로 잠들며, 가라앉은 잠 속에서 더 깊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가라앉는 꿈을 꾸게 된다. (그들에게, 아니 사실은 모두에게) 죽음은 가라앉는 것이다. 죽음이 만들어내는 물체, 즉 주검이 다름 아닌 땅 ‘아래’로 매장된다는 사실은 죽음의 운동성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라앉는 삶을 죽음의 가장 직접적인 예표(prefiguration)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우리 모두는 땅이 아닌 바다 속에 실로 거대한 지하(해하라고 불러야 할까?) 방이 생성되는 장면을 목도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딛고 선 땅 전체가 사실은 거대한 지하 방, 다시 말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아 있)는 방이 아닐까 하는 (경악에 가까운)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의구심 때문에 그들은 (제대로) 눕지 못했고, (쉬이) 잠들지 못했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떨치고) 일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못하고 있다.

지금 이 서문이 쓰여지는 시점은 저 끔찍한 해하 방이 만들어진 날로부터 100여 일이 지난 시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온 세계를 거꾸로 뒤집어버린 전대미문의 사건, 즉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꼭 100년이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상징적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우리는 여전히 저 전쟁이 만들어놓은 세계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 뒤집어진 세계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이다. 매달린 자들, 손 묶인 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100일이 지났으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100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뒤집혀 있다, 세상은. 이런 세상, 모든 것이 뒤집힌 이런 세상에서는 안전이 오히려 위협이 되고, 행복이 거꾸로 고문이 된다. 전도되는 것은 비단 본말만이 아니다. 뒤집혀진 상태에서 계속해서 더 뒤엉키고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무엇이 뒤바뀌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가장, 아니 어쩌면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가라앉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예술이라 불리는 어떤 활동, 사유라는 이름을 내거는 어떤 작업—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면 말이지만—을 하는 자들에게 어떤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저 끔찍한 확실성을 거부하려 애쓰는 대신 오히려 그 끔찍함에 존재 전체를 의탁하는 방식으로만 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 가라앉지 않으려고, 표면에 머무르려고 온갖 애를 쓰거나 혹은 위험한 깊이를 제거하기 위해 표면을 대충 땜질하는 식의 그 모든 대처 방안들을 우리는 기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행성의 모든 땅이 꺼지도록 거대하고 깊은 한숨을 다 같이 일시에 내뱉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우리의 모든 활동을 그 보편적 한숨에 남김없이 집중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조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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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 사건과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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